굴레를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굴레를

**

by newbest@tistory.com 2026. 5. 12. 16:00

본문

‘램프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듯이 현대인들이 근심과 걱정을 불러내 자신을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의 선조들이 주로 현재의 생존을 위해 걱정했다면, 우리의 걱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다. AI가 일상에 스며들고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행복은 역설적으로 더 멀어져 버렸다.

24시간 연결된 초연결 사회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벽이 사라지고 모든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불안은 알지 않아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아는 데서 온다. 과도한 연결은 오히려 소외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초연결은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켰다. 나만의 소박한 행복을 위해 적당한 울타리와 담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현생 인류에게는 이제 스마트폰 안과 밖, 두 가지 삶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서의 삶은 조명이 달린 투명한 어항 같아서 아주 작은 것까지 환하게 비춘다. 호텔 패키지, 유명한 맛집, 명품 선물 같은 일상은 그곳에서 사진 몇 장으로 압축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초라해진다.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근심으로 바뀐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이 완벽해 보이는 건 힘든 ‘노동’을 치우고 ‘여유’를 확대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개한 꽃만 전시하고, 뒤편의 거름과 가지치기의 흔적을 치우는 정원사처럼 말이다.

비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남의 숫자가 더 작아 보이는 고장 난 체중계와 같다. 세계 둘째 부자조차 첫째의 무게에 짓눌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선택적 무지의 지혜다. 그것이 불통과 차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비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알라딘의 램프는 스마트폰이다. 잠들기 전 어두운 방에서, 저마다의 작은 화면이 램프처럼 빛난다. 문제는 우리가 램프에서 요정이 아니라 괴물을 불러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 희망의 요정인가. 불안의 괴물인가. 그 램프를 켜는 것도, 끄는 것도 결국 나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정판  (0) 2026.05.14
품어둠  (0) 2026.05.13
떠돌이  (0) 2026.05.12
멀리서  (0) 2026.05.10
재탐색  (0) 2026.05.10